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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에서 보내는 시간에 대한 짧은 고찰

최근 나의 삶은 3할이 요리이다. 직장과, 음악과 요리. 이 세가지가 내 일상의 전부인 듯 하다. 때문에 잠시 왜 이런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졌다. 

엄마는 요리사였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마자, 한창 적응할 무렵, 가족은 엄마가 열게 된 작은 한식당을 위해 서울에서 포천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마포로 회사를 다니시던 아빠는 포천에서 서울로 출퇴근을 하는 강행군을 마다 하지 않으셨다. 언제나 좋은 음식솜씨로 주변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던 엄마였지만, 음식을 만드는 일이 업이 되고 나자, 평범한 가정주부로 10여년을 살아오던 엄마의 일상이 많이 바뀌었다. 즐거워서, 취미로, 행복을 위해 만들던 요리가 생존을 위한 수단이 되고 나자, 엄청난 매너리즘과 딜레마로 다가왔다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과 고생으로 다가왔다고 하셨다. 그러나 엄마는 꾸준히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고, 조미료를 쓰지 않지만 맛깔나는 갖가지 밑반찬을 준비해서 초능력의 힘을 발휘하여 식당을 운영하셨고,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식당을 하는 일은 매우 고된 일이다. 그 식당이 어떤 종류이든. 사람을 쓰기는 했지만, 음식을 만드는 것은 무조건 엄마의 손을 거쳐야 했기에, 엄마는 30대 초반 부터 40대 초반까지, 어쩌면 가장 꽃다울 10여년, 가장 고생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지인들을 초대하고, 워낙 음식을 만들어 나누기를 좋아하는 엄마였기에, 속사정을 모르는 친구들이나, 아버지 친구들은 집에 오면 음식 잘하는 부인을 둬서 좋겠다고, 소원이 없겠다고 얘기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음식을 잘하는 것은 물론 부분적으로는 행복한 일이나, 업으로 삼고 나면 그것만큼 고단한 일도 없다고 하겠다.

엄마의 식당은 1층이었고, 집도 바로 그 윗층이었기에, 부모님이 두분 다 일을 하신다고 해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언제나 엄마가 집에 있는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집에 혼자 있기 보다는 식당 안에 있는 방에 들어가 퍼즐을 맞추고 놀거나, 책을 읽거나, 외화시리즈를 보곤 했고, 엄마와 조근조근 수다도 많이 떨었다. 그래서 유년기에, 엄마가 일을 한다고 해서 엄마의 손을 타지 못한다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철이 들만큼 들고, 다 크고 나서 엄마를 바라볼 때 마다 나는 어떤 경외심이 생기곤 한다. 하루 10시간 가량, 식당에 묶여있으면서도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모를 정도로 초인의 힘으로 살림도 모두 완벽하게 해내시곤 했다. 아빠가 많이 도와주셨다고는 하지만, 새벽같이 출근해서 저녁늦게 오는 연구원 생활에, 엄마의 가사를 돕는건 사실상 거의 불가능 했다. 주말에는 전적으로 도와주시는 편이었지만, 평일은 대부분 오롯이 엄마의 몫이었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딸의 엄마, 그리고 한식당을 운영하는 일은, 어쩌면, 서른 즈음의 엄마에게는 너무나 고된 역할들이었으리라. 엄마가 식당을 하던 과거 10여년 동안, 사실 나머지 가족구성원들은 호강을 한 셈이다. 분명 엄마의 육체적인 소모를 알았지만, 나는 언제나 사고뭉치였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뭔가 좀 엄마를 도와드릴 법 한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주방이 무서웠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게, 설거지를 하다가 와장창창 그릇을 깨거나, 별로 힘들지도 않은 간단한 칼질에 피가 뚝뚝 떨어질 정도로 손을 베거나, 홀에서 간단한 서빙을 하다가 쟁반 전체를 뒤집어 엎는게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주방에 들어서는것에 일종의 트라우마가 있었다. 내가 손을 대는 것 마다 깨지고 부서지니까, 그 후에 엄마가 뒤치닥거리 하는 것도 미안했고, 조심성 없는 성격이 밉기도 했으며, 살짝 베는 것만으로도 엉엉 우는 엄살이 심한 아이었으니까. 그러면서 나는 주방에서 멀어져갔고, 주방과 나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 했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다닐 때도 언제나 나는 주방에서 멀찍이 떨어진 사람이었다. 사고를 쳐서 여러사람을 힘들게 하느니 그냥 손을 놓자라는 생각도 있었고, 조심성 없는 나와는 다르게 동생은 초등학교 때 부터 엄마 옆에서 곁눈질로 배운 요리실력이 이미 엄마 뺨을 살짝 칠 정도였으며, 간혹 엄마의 식당일을 도울 때도 전문가 처럼 잘 해 내었다. 그런 동생을 보며 나는 주눅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성장기에, 자연히 나는 아빠와 보내는 시간이, 동생은 엄마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일요일은 무조건 가게문을 닫고 온가족이 나들이를 가는 날로 정해놓았기에, 또 여행을 좋아하시던 부모님 덕에, 주말에는 전국 각지를 돌며 맛집도 가고, 캠핑도 하며 지냈다. 어릴 때는 그런 시간에 부모님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하시는건지 감히 알지 못했다. 곤히 잠든 나와 동생을 깨워 이미 떠날 준비를 하고 반 수면 상태에 있는 우리를 가끔은 업어서 차에 태우고 강원도로, 남도로, 전라도로 돌며 캠핑도 하고, 그 지역의 음식도 먹고 하던 그 시간들. 월요일 부터 토요일 까지 4-5시간 자고 출근하는 아빠, 그리고 하루 10시간 이상 식당에 매여있던 엄마에게는 엄청나게 고된 시간이었으리라. 

그러나 부모님은 우리가 어릴 때, 무리를 해서라도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고 하셨다. 비록 세계여행을 다닐 수 있는 정도의 부유함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가능한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기억하지 못할 무렵부터,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까지, 정말 지겹게도 돌아다녔다. 그 여행의 기억들은 아직까지도 나를 지탱하는 힘의 원천임을 부정할 수 없다. 뭔가 대단한 장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처럼 캠핑이 럭셔리한 취미생활이자 트렌드로 자리매김하기 전이지 않은가. 그저 아빠 차에 텐트와, 코펠과, 침낭4개, 에어쿠션 베드 두개만 실으면 끝이었다. 날이 너무 추우면 숙소에서 자고, 봄가을에는 텐트에서 잤다. 덕분에 나는 눈 감고도 텐트를 뚝딱 칠 수 있고, 무인도에다 갖다 놔도 얼마간은 거뜬히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의 생존기술을 터득했다. 동생이 엄마와 요리를 할 때, 나는 아빠와 나무를 깎고, 텐트를 치고, 고기를 잡고, 풀을 뜯으러 다녔으니까. 

엄마는 내가 고등학교 들어갈 무렵 식당을 접으셨다. 포천에는 은근히 관광지가 많다. 서울에서 막히지 않으면 강변에서는 40분, 강북에서는 1시간, 강남권에서도 1시간 반이면 갈 수 있다. 때문에 서울에서 유입되는 주말 행락객들이 많았고, 주변에 산정호수, 아도니스 골프장, 백운산, 베어스타운 등이 있기에, 단골 손님들도 꽤 많았다.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면 배가 터지도록 둥둥거리고 먹고, 교복 치마를 풀고, 내 방에 가서 까르르 거리고 놀다가 보낸적도 손을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엄마가 식당을 했던 시간은, 엄마에게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이기적인 나에게는 행복한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방에 틀어박혀서 책을 보거나, 외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했으니. 내가 식당에 나가서 뭔가를 도와주고 싶어도 나는 사고만 친다고 주눅이 들어있었으니. 성장기에 나는 엄마를 충분히 도와줄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기심과, 자격지심을 변명삼아 주방에 전혀 출입하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가 식당을 접고 다시 가정주부로 돌아간지 5년이 지났다. 

졸업 후 성대에 문제가 생겨 직장을 쉬어야만 하는 위기가 왔었고, 시기가 잘 맞아 스위스에 인턴을 갈 기회가 생겼다. 나는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다 털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비행기에 올랐다. 2008년 여름이다. 인턴기간이 끝나고, 혼자 여행을 하기 시작할 무렵은 내 생일과 맞닿아 있었다. 파리에 있는 호스텔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이 내 생일이었다. 호스텔의 다른 여행객들은 사실 만난지 불과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몽마르뜨 언덕 아래에 있는 우드스탁 호스텔. anvers역에서 걸어서 5분거리. 그 곳에서 나는 라면과 프렌치 토스트가 할 줄 아는 음식의 전부였던 나의 요리 역사에 한 획을 긋는다. 도착해서 짐을 풀자, 이미 저녁이었다. 몇개월 여행할 예정이었기에 휴대폰을 갖고 있었고, 부모님과의 통화를 들은 호스텔의 투숙객들은, 나에게 생일 파티를 하자고 제안한다. 나는 겁도 없이 저녁을 준비하겠다고 했고, 그들은 와인과 이런 저런 식재료를 사왔다. 그래서 태어나서 처음 스파게티를 만들게 된다. 그것도 토마토 소스와 크림소스 둘 다. 

내가 왜 그렇게 무모한 도전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10인분 이었다. 주방에 있는 가장 큰 솥 두개를 사용, 면을 삶고, 동시에 소스를 준비해서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호스텔에서 걸어서 5분거리에 coop이 있었기에 식재료를 사오는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디서 본건 있어가지고, 카프레제와, 시저샐러드와, 스크램블드 에그와, 카나페도 만들었다. 그런데 그 때의 모든 음식은 성공적이었다. 맛도 있었고, 모양도 예뻤다. 

처음으로 주방에 들어가서 자신감을 가진 계기였다. 그리고 그 날은 내 생일이었으며, 열두어명의 호스텔 투숙객 모두가 마당에 둘러모여 내가 만든 음식을 접시에 담아 먹기 시작했다. 우리는 오랜 시간 함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저 음식을 나누고 수다를 떨며 한잔을 기울인다는 그 자체가 너무 좋았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유럽 배낭여행을 한다는 독일에서 온 18세 소년, 담낭암을 이겨내고 유럽 배낭여행을 하고 있다는 호주 공기업 출신의 40대 아저씨, 8년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충동적으로 유럽에 와서 6개월 째 여행중인 미국의 단역배우, 배낭여행 중인 3명의 스위스 출신 동네 친구들, 뉴욕에서 모델을 하다가, 프랑스에서 모델을 하겠다고 처음 왔지만, 록음악에 빠져 가수가 되겠다는, 아기네스 딘을 닮았던 20살의 아가씨. 

그들의 생일 축하노래를 듣고, 음식을 즐긴지 얼마간 흘렀을까. 나는 그 곳에 오래 있기로 결심한다. 원래 가족과 여행하기로 약속한 시간은 1달이었다. 하지만 그 한 달은 두 달이 되고, 세 달이 되고, 이윽고 몇달이 되었다. 

나는 계속해서 같은 숙소에 있었다. 일종의 장기 투숙이었다. 그리고 파리 전역을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다시 기차를 타고 스위스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당일치기로 가능했거나, 밤을 새워 이동하는 것이 가능했기에, 나의 행동반경은 파리와 스위스 뿐이었다. 시간이 날 때 마다 파리 각 지역에 있는 재래시장으로 갔다. 싱싱한 해산물을 사오기도 하고, 야채와, 과일과, 치즈를 샀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토마토고, 당근이고, 브로컬리나 컬리플라워, 자몽 모두 낱개 구입이 가능했다. 때문에 아주 가끔은 식당에서 음식을 사먹었지만, 대부분 별별 실험정신을 다 동원해서 요리를 해먹었다. 감히 요리라고 말할 수 있다. 책도 없이, 블로그도 없이, 그저 본능적으로 이리저리 만들었기 때문이다. 더이상 손을 베지도, 손을 데이지도, 접시를 깨먹지도 않았다. 그렇게 사방을 걸어다니며,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버스를 타고 다니며, 아주 가끔 유람선도 타며, 몇달을 보냈다. 그리고 아빠가 공항에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까맣게 타고, 저체중으로 심각하게 살이 빠진 상태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빠는 내가 캄보디아 난민 같다고 했다. 아쉬움이 남아 빨리 집에 돌아갈 수 없기에, 나는 부모님께 연락을 매우 가끔만 하며, 잘지내고 있다고 짧은 몇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휴대전화는 꺼 두었다. 2주에 한번, 3주에 한번 전화만 할 뿐이었다. 이미 비행기표를 연장해야 했기에 나는 한국에 돌아가면 한껏 혼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여행경비가 모두 떨어졌으므로, 돌아가야만 할 때, 어쩌면 나는 다시 외국에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까지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내가 너무 가끔만 연락했으므로, 혹시 내가 외국에서 죽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에 만료된 여권을 재발급 하여 프랑스로 올 생각까지 하셨다고 했다. 그러나 내 몰골을 본 아빠는 차마 혼낼 수 없다고 했다. 말 그대로 나는 깡 마르고 까맣게 탄 캄보디아 난민의 모습이었기에. 

집에 돌아오고 나서 나는 갑자기 주부가 되었다. 

주방에서 부모님이 돌아오시기 까지를 기다리며 갖가지 요리를 실험해 보기 시작했다. 

월남쌈, 고구마 케익, 스위스에서 먹던 치즈를 잊지 못해 치즈를 만들고, 베이글을 굽고,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를 끓이고, 종류별로 다양하게 시도해 보았다. 너무나 체중이 줄어있었고, 체력이 떨어져 있었기에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엄마와 수영을 다니고, 산책을 다니며 체력을 되돌리는데에 집중했다. 나의 변한 모습을 본 엄마와 아빠는 비록 네가 마치 네가 죽은 줄 알게 마음 고생을 시키며 여행을 다닌 탓에 오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러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좀 철도 들고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고 하셨다. 그러며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다 된거라며 원래 살던대로 살라고 하시기도 했다. 하지만 그 요리에 대한 늦은 도발은 현재진행형이다.

부모님은 여전히 포천에 사신다. 

퇴직 후 살아가기에는 좋은 곳이다. 공기도 맑고, 주변 사람들도 포근하며, 엄마 아빠가 18년을 사신 곳이니, 이젠 제 2의 고향이라 생각할 만도 하다. 

꼭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 엄마가 식당을 닫으 셨으니,식당을 접으신지는 10년이 지났다. 간혹 엄마의 식당에서밖에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이 그리울 때도 있다. 쟁반 막국수, 버섯 매운탕, 흑돼지 삼겹살, 이런 메뉴들은 다른 어느 곳에서 먹어도 예전 엄마에게서 먹었던 그 맛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엄마가 그때의 재료를 다시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저 그리움으로 남기고 지금의 엄마 음식에 만족하는 수 밖에. 

변한것은 바로 나다.

내가 주방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주방이라고는 기피하고 꺼려하던 내가, 주방에서 보내는 시간에 행복함을 느끼게 된것이다. 

전환점은 25살 때였고, 이래 저래 주방에서 투닥거림을 한지는 불과 4년에 지나지 않는다. 

혼자 엄마 음식을 회상하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대충의 조리법을 들은 후, 막 만드는데, 그 맛이 엄마가 만들어 준것과 비슷하면 괜히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아무리 비슷하게 흉내 내려고 해도 엄마와 비슷한 맛이 나지 않을 때는 아직 멀었구나 생각하기도 한다. 

나는 요리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냥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막 꺼내서 대충 이렇게 만들면 되겠구나 하고 만든다. 

손대중으로, 눈대중으로. 

제빵의 경우에는 말이 다르다. 계량이 중요하기에, 블로거의 조리법이나, 요리책을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자주 하던 메뉴들이 손에 익으며 배우는 한가지는, 요리를 한다는 것은 결코 힘들거나 고된 노동이 아닌 자기 치유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물론 업이 아닌 취미로 했을 때의 일이다. 업으로 해도 행복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지난 몇년간 식당을 했었던 엄마를 보면, 요리를 업으로 하는것은 결코 녹록하지도, 아름답기만 한것도 아니다. 

지금은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주방으로 간다.

최근 들어 사실 주방 출입이 잦아졌다. 빵을 구울 때면 방안 가득 달달하거나 고소한 냄새가 퍼지고, 그 달콤한 냄새에 질려 정작 나는 많이 먹지 못한다. 대부분 포장해서 지인들을 나눠주곤 하지만, 반죽을 하고, 오븐 속에서 봉그랗고 예쁘게 일어나는 빵이나, 쿠키나, 마카롱들을 보자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매우 많이 실수를 하기도 하고, 실패작이 나오는 경우도 빈번하다. 그러나 그저 뭔가 과정을 가지고 생산을 해낸다는것 자체에 치유의 효과가 있는 듯 하다. 

아직 나는 매우 요리에 어설프다. 태우기도 하고, 간을 못맞추기도 하며, 너무 익혀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한 음식을 만들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는지를 익혀가고 있으며, 간혹 지인들을 집에 초대해서 내가 만든 음식의 상차림을 할 때, 그 음식이 어설프든, 맛있든,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을 보며 엄마미소를 짓곤 한다. 

나는 왜 엄마가 그렇게 사람들에게 음식을 해서 퍼주는 것을 행복해 하는지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식당을 하기 이전에도, 식당을 하셨을 때에도, 식당을 접은지 오래 된 지금도, 엄마는 주변 사람들에게 음식을 해서 나누는것을 좋아하신다.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으시단다. 

나의 본업은 요리가 아니며, 앞으로도 그러하겠지만, 나는 어쩌면 그런 엄마의 기질을 물려 받았고,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 받았던 트라우마 아닌 트라우마 안에 나를 가두고 있다가 너무 늦게 어쩔 수 없는 엄마 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일지 모른다. 

바시바시 움직이며 만들기를 좋아하고, 설령 그것이 성공작이 아닐 지라도, 객관적인 평가는 하되, 엄마가 만든 어떤 음식이든 투정하지 않고 맛있게 드셨던 아버지와 우리들. 

그리고 10년이 지나 이제서야 요리에 첫 맛을 들이기 시작한 나.

근 20년 엄마 옆에서 요리를 꾸준히 해오던 동생. 

결국 피는 못속이는 셈이다. 

나의 비 정기적인, 간헐적인, 그리고 주인 마음대로인 심야식당은 언제나 열려있다. 

나만을 위함이 아닌, 다른사람을 위한 음식을, 타인이 맛있게 먹어주면, 그것은 상대방을 위한 토닥거림임과 동시에 나에게 매우 행복한 일이기도 하며, 만들고, 먹고, 나누고,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그 과정 전체에서 서로의 마음을 지긋이 눌러 꼬옥 안아주는 시간이 되기에, 나는 비록 어설플지라도, 심야식당을 간간히 운영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