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면이 참 맛있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 아니, 먹어도 먹어도 또 먹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맛있는 쫄면엔 단점이 한 가지 있었는데 너무 많이 먹으면 속이 쓰리다는 점이었다. 무얼 먹든 하루도 쉼없이 먹는다면 속이 멀쩡할 리 없고 그게 쫄면의 매콤하고 자극적인 양념이라면 위가 항의하는 것도 당연했다… 만, 그래도 쫄면은 맛있다. 누가 말해주길, 무언가에 빠지면 끝을 보는 성격이라 했는데, 쫄면의 끝은 어디길래 어째 도통 질리지가 않을까? 그게 궁금하니 오늘도 학교 끝나면 쫄면을 먹으러 가볼까나? - 엄마는 쫄면을 한 입 가득 우물거리면서 옛날 이야기를 했다. '참 좋아했었는데…' 하며 아련해하는 모습이었는데, 그건 그때 먹었던 쫄면이 아니라 그때 쫄면을 무척 좋아했던 소녀를 향한 아련함 같아 보였다. 아, 그랬지, 우리 엄마도 소녀였지.
나와 아버지의 관계를 설명하자면, 부(父)와 자(子), 두 글자가 갖는 의미를 가장 흐리게 희석한 뒤 겨우겨우 남은 부분을 겹쳐놓은 부자(父子)라 하겠다. 의미가 희석되어오던 때의 이야기는 매우 복잡했지만 결국 가장 간단한 의미만을 남겨버렸기 때문에 지금에 와선 그저 아비와 아들일 뿐인 단순한 관계. 그 진짜 의미를 알게 된 것은 아버지의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다른 평범한 날처럼 출근 전 여유있게 나와 카페에 앉아 펜을 들고 있었을 때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 아버지의 목소리는 취해 있었다. “뭐하냐”로 시작하는 첫마디는 전과 똑같았지만, 이따금 취해서 전화했을 때처럼 살짝 달뜬 목소리는 똑같았지만, 수화기 너머로 흘러 나오는 감정은 달랐다. 수화기 너머의 아버지는, 넓은 장례식장에서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말이 조금 통하는 동생과 술을 한 잔씩 마시다가 문득 외로움을 느낀 것만 같았다. 아버지와 나는 그저 그런 평범한 문답을 나눴지만, 아버지의 목소리는 어떤 울부짖음 같앗다. 눈물을 왕창 쏟기 직전에 울음을 참으며 잇새로 흘리는 비명 같았다. ‘아들아 아니, 친구야, 혼자선 힘들어서 울 것만 같아. 내 손 잡아주러 와라.’ 아버지는, 우리 사이에 남아 있는 딱 하나의 (단순한) 의미에 의지해 나를 찾고 있었다. 만약 아버지가 전처럼 자신의 강고함을 드러낸 채 나의 손을 잡아 채듯 끌고 갔다면 나는 우리의 관계를 서로에게 주지시키며 “나중에 시간 나면 그때에나…” 보자고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더 이상 그러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아버지는 그저 나이 든 남자였을 뿐이었다. 모자란 사람. 통화를 마치고 나는 곧바로 짐을 챙겼다. 장례식장에 맞는 옷이 있으려나 싶었다. 구두는 신어본 지가 오래 전인데 괜찮을 런지.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출발하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외로운 당신께 아들이 가고 있노라고. - 17.08.26.토 -
그곳은 내게 위험한 곳이었다. 사진기를 이리저리 움직여도 구도가 잡히지 않고 자세히 보려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어 그 자리에서 얼핏 보이는 낙서만 멍청히 지켜봐야 하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분명 내 인생에 무언가 던져줄 것 같은 그런 곳이었다. 그곳이 내게 떨어지는 순간, 그 위험한 곳이 내게 다가오는 순간은 내 삶도 위험할 때일 테지만 그곳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낙서라 생각되는 저것이, 어떤 선명한 그림이 되는 순간 내가 어떤 준비가 되어 있을까.
복잡해. 답답해. 생각처럼 안 되는 게 너무 많아.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어. 도망치지도 못 해. 마음이란 게 이토록 제멋대로인 줄 알았다면 조금은 더 신중했을 텐데.
#1. 바람을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 같아 별똥별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하늘은 아무것도 들어주기 싫은양 별똥별을 보여주지 않았다. 포기하고 싶었다. #2. 별똥별이 내릴 거라는 소식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만약 보게 되면 빌고 싶은 소원이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 순간 알았다. 달님이 늘 기다려왔다는 것을. #3. 달무리가 너무나 예뻤다. 지긋이 보고 있자니 별도 예뻤다. 아아, 밤하늘이 정말 예뻤다. 네게도 보여주고팠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 그 새벽 저 아파트의 숲에서 자고 있는 너를 깨우고 싶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너의 왕자는 내가 아니라 나는 조용히 숲을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숲은 내겐 너무나 먼 곳, 나와는 너무나 다른 곳. 너와 나는 사는 곳이 달라. 네 인생 속 나는 그저 지나가던 어느 난쟁이 정도가 아닐까.
우연히 좋은 사람과 함께 하게 될 때가 있다. 생각지 못 했던 일들이 함께 일어나고 그 일들을 함께 해나가고. 그러다보면 우연히 시작한 일들이 더 굉장한 우연을 부른다. 우린 어제 그저 웃으며 그 순간을 넘겼지만, 우리가 배경으로 삼았던 하늘은 4년만의 월식이 있던 하늘이었다. 어떤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아도 충분히 굉장한 순간이 되는 마법. 우연히 우린 대단한 새벽을 보냈다.
기억이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 기억을 떠올리면 그 순간을 다시 겪는 듯이 생생해지는데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렀다 하더라도 기억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의 바깥에서 사는 우리는 시간과 함께 변해가고, 떠올려야 하는 순간과 현재는 다른 모습으로 있기 마련이다. 어리고 귀엽기만 했던 그때 그 동생들이 기억 속의 모습과 다르게 어른스럽고 멋진 현재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여지 없이 당황하고 혼란에 빠지고 만다. 어설픈 나의 기억력이 최신 버젼으로 알아서 갱신해주지 않으니, 얼굴과 이름을 매치 시키지 못한 현실의 나는 그저 미안해하며 고개 숙일 수밖에.
